**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24)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동일하게 햇빛을 비춰 주시고, 밭에 동일하게 비를 내려 주시는 것처럼 차별이 없다. 그러나 이기는 방법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견디기 힘든 고난과 슬픔과 근심 속에 있는 분 계시는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고, 근심에서 벗어나시고, 승리하시기 바란다.
Ⅰ. 성도들에게는 환경을 뛰어 넘는 기쁨이 있다(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했다. 여기서 “애통하다” 하는 이 말은 또는 ‘애곡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울다’ 와 함께 사용되어 예수님의 죽음이 제자들에게 큰 슬픔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지만, 그 부정적인 아픔과 슬픔 염려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정적인 상황을 뛰어 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슬픔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라는 의미이다. 십자가가 제자들에게는 처음에 슬픔의 원인이 되나 나중에는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L. Morris).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하셨는데 믿는다는 것은 원어의 뜻은 맡긴다는 뜻이 있다. 벧전5:7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했다. 우리는 근심이 있을 때 우리의 근심을 우리의 생명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께 맡기고, 기쁨으로 믿음의 생활로써 승리하시기 바란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중에 서두에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고 세상은 기뻐하리라” 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패배한 것 같으나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을 보라. 계속 역전승할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닌가?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근심을 맡기심으로 환경을 뛰어 넘어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란다.
Ⅱ. 기쁨의 이유는 부활의 주님을 보는 것이다(21,22)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했다. 이 말씀은 지금은 근심하나 나중에는 기쁨을 얻을 것이며,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이다. 근심 중에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 충만으로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아래 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은 주님을 만나고, 그에게 믿음으로 맡길 때, 당면한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복음 전파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며, 찬송했다. 그 때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하면서 그는 주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않고, 기뻐했다. 요16:22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볼 수 없는데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다시 본다는 말씀이다.
Ⅲ. 구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신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26절) 제자들이 직접 하나님 아버지에게 간구(27절)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게 기도하지 말고,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성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것을 강조하신다.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했는데 이 구절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26, 15:16)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시리라’ 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또한 그의 이름으로 기도 응답을 받는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 졌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24절에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했다. 한 마디로 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 가 되신 것을 믿는가? 롬8:14,15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시련 중에 근심 중에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너희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줄 것이라는 것이다. 시16:11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셨으니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에게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넘치게 부어 주신다.
성도여러분! 근심스런 일이 있는가? 슬픈 사연이 있는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을 수 없다. 지금은 슬퍼하며 근심하지만, 인생 역전을 함으로 기쁨이 찾아온다. 우리의 기쁨은 기쁨의 근원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때에 충만하게 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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