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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회복이 있는 공동체
이종문 2017-06-11 추천 0 댓글 0 조회 58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공동체(창45:1~10)


  가정과 교회 등 공동체 안에는 깨어진 관계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치유와 회복이 절실하다. 화해는 무엇이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과 그 잘못에 대한 고백, 그리고 용서의 제안과 그 수용을 필요로 한다. 여러분들은 공동체 속에서 상처는 없는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는가? 원한을 갚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화해하기를 원하는가?

  요셉이 애굽으로 온 것은 형들이 노예로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들에게 원망하거나, 복수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들의 비윤리적이고, 죄악된 행동을 탓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애굽으로 온 이유, 즉 과거 자신이 경험한 불행과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해를 추구한 요셉을 본받기 원한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초로 상처를 극복하는 비결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요셉이 형제에 대한 사랑이다(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요셉은 지금까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벅찬 감정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하였다(42:24;43:30). 형제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더 이상 가누지 못하는 요셉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요셉은 형들이 과거에 자신을 왕따시키고, 괴롭힌 것에 대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 싶지 않았다.

 

그래서 봇물 터지듯 밀려오는 정을 억제할 수 없었던 요셉은 주변의 하인들을 모두 밖으로 나가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형들의 과거 비리(37:18-28)가 애굽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Calvin). 그러나 요셉이 이렇게 한 이유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하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 당시의 관습 때문이었을 것이다(42:24;43:30. Whitelaw).

 

  “요셉이…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했는데 이는 격한 감정으로 부르짖듯(시34:15) ‘선언하는 것’(렘34:15)을 가리킨다. 이같은 행동은 요셉이 형들의 과거 행동을 문제 삼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는 넓은 아량의 표현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인간관계 속에서 넓은 아량을 갖는 것이 치유와 회복의 출발점이 된다. 요셉의 구체적인 행동을 살펴보자.

 

  ①요셉은 큰 소리로 울었다(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했다.

   이는 당시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와 형제들의 사랑에 얼마나 감격했는지를 꾸밈없이 보여준다. 요셉이 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울 때에 그 울음 소리가 “바로의 궁중에 들렸다” 이에 대하여 랑게(Lange)는 요셉의 사저(私邸)가 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 울음소리가 직접 바로의 궁정에 들렸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의 주장처럼 요셉의 하인(하급관리) 중 하나가 요셉의 울음 소리를 듣고, 바로에게 보고한 것으로 본다(Keil. Murphy).

  “큰 소리로 우니” 이는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랑과 애정으로 바뀌면서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이 일순간 솟구쳐 오른 요셉은 더 이상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요셉은 더 이상 애굽의 총리가 아니라, 형들과 양을 치며, 아버지에게 귀여움 받던 어린 시절의 꿈쟁이 요셉이었다. 화해를 위한 요셉은 총리 자리에서, 동생의 자리로 내려 왔다.

  요셉이 형제간의 낮은 자리에 내려 오지 않았다면,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이루어 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이 강대국의 실권자 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형들을 복수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그의 솔직하고, 여전히 순수한 겸손한 인간성이 보인다.  

  요셉은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솔직한 감정은 치유의 역사를 가지고 온다. 긍정적인 감정의 표현은 치유의 역사를 가져 온다.  

  또 상처가 치유받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상처받은 현장을 외면하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 내가 가정 공동체에서 상처 받았다면, 치유받기 위해 그 가족 관계 속에서 들어 가야 한다.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는 아픈 과거를 정리하고, 객관화해야 한다. 사람들은 상처, 쓴 마음을 가지게 되면, 보복과 원망 등과 함께 과거 회상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쓴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록 과거 지향적이 되고 만다.

  마치 이런 행위는 페트 윌미암스의 표현대로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백밀러를 쳐다보며 운전하는 일과 같다. 백밀러는 가끔, 힐금힐금 곁 눈길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뚫어 지게 쳐다 보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사람은 그 만큼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갈 위험성이 크다. 우리들이 상처를 치유받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널은 아량과 솔직한 감정 표현을 할 때에 용서하면, 화목하게 되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②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했다.

   “나는 요셉이라” 요셉이 형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주도권을 잡고,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행방불명된 줄 알았던 동생, 실종 처리된 동생이 지금까지 살아서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형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요셉의 어릴 적의 입장이 형들과 완전히 바뀌었다. 형들은 힘 있는 자들이었고, 동생 요셉은 힘없는 약자였다.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죽을 고비에서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요셉은 형통하게 되었다. 요셉이 형들과 화해하지 않고, 괴롭히려면, 자기 자신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을 밝힌 것은 자신이 형들의 행동을 용서하고,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힘없이 두려워 떠는 형들에게 아량을 베푼다. 여기에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고, 용서와 치유와 회복이 있다. 여기에서 인간 요셉의 위대성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다. 즉 죄인을 용서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연상할 수 있다(요3:17).

  요셉은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라고 질문했는데 자신의 신분을 밝힌 요셉의 첫번째 질문은 아버지의 안부에 관한 것이었다. 요셉은 이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안부를 확인했다(시43:27,28;44:17-34). 요셉이 다시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되묻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아들로서 자연스런 질문이다. 특히 이전에는 “그 노인”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43:27) 이 구절에서는 “내 아버지” 란 말을 씀으로써 더욱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Alford).

 

  요셉이 형들에게 아버지의 생존을 물었으나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했다.

 동생을 증오하면서 팔아 넘겼는데,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애굽에 형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애굽에 양식을 구하려 갔는데 이것은 호랑이 굴에 스스로 들어 간 것이 아닌가?

 

  요셉은 과거를 돌아 보며, 후회하지 않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주목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살았다. 치유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하다. 그리고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요셉처럼 죄인을 용서하고 넓은 아량을 품고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데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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